Families

그 땐, 오곡백과보다 더 많은 친구들, 같이 노래할 수 있을까

타국 생활 중 가장 마음이 아리는 시기는 명절이다. 파티는 즐겁다.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술을 마시고, 기타를 치며 서로의 노래와 이야기를 나누고. 하지만 그 하루가 지나 잠에서 깨었을 때, 함께 있던 공간 안의 모두의 부재와 달라진 공기의 변화를 깨닫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한국을 처음으로 벗어나 엘에이에 발을 디딘 2009년, 아마도 Thanksgiving 전날이었을 것이다. 아파트 친구들을 모아 파티를 하고 다음날 라면을 먹으러 나갔고, 한국과는 달리 명절날 모든 음식점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후로는 집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해장을 한다. 식탁 없이 작업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양푼냄비와 김치 한 접시는 매번 그 모양새가 참으로 쓸쓸하고 맛이 없다. 루시드폴의 노래를 듣는 것은 그 당시의 나에게 참 좋은 위안이었다.

 

여느 때처럼 춥던 오후
전화기 너머 들리던 서울의 밤
내가 보고싶다는 친구들
너무 고마워

올해 달력 위 붉은 글씨
추석이 와도 약해지지 않으려 해
나는 좀 더 강해지고 싶어
지금보다 더

또 사 년이 지나면
더 풍성한 마음으로
그 땐, 오곡백과보다 더 많은 친구들
같이 노래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 쌓인
그리움 모두 녹여 노래에 실으면
나의 사랑스런 친구들
모시에 쪽빛이 스미듯이
내게 스며들겠지

냉각된 가을
혼자남은 타향의
읊조리는 겨울 노래
마음은 노을이 되어
나는 어느 곳에 있어도
고향을 물들이겠지

 

두 명의 어머니와 두 명의 아버지

시간이 흘렀고, 나는 좀 더 강해졌으며, 외로운 만큼 더 많이 웃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Art Center 재학 시절 유난히 날 챙겨주시던 Ophelia 선생님이 계셨다. 수업 외에 가족 모임이 있으면 항상 날 불러 따뜻한 밥을 내어 주셨다. 그리고 어느 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제부터 당신을 엄마라 부르라 하신다. 내 외로움이 들켜버린 것일까, 혹은 내가 당신의 외로움 안에 본능적으로 둥지를 튼 것일까.

십 년 전, 처음은 힘들었다. 브라질 아빠 Valtinho에게 Dad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익숙해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피가 섞이지 않는 누군가를 가족으로 대한다는것이 많이 어색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일에 익숙해진걸까. 나는 선생님을 친엄마처럼 따랐고, 선생님은 그런 나를 혈육 이상으로 품어주셨다.

 

서른 살의 사춘기

몇 해가 지나 학사 과정을 마쳤고, 나는 석사 과정을 위해 뉴욕으로 터전을 옮겼다. 사람들, 그 사이에 흐르는 공기, 삶이 흘러가는 속도, 뉴욕은 모든 것이 달랐다. 찰나에 사랑에 빠졌고, 일 년 남짓 지속되었던 인연에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감춰두었던 외로움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상처를 주고 받는 일에 염증이 났고, 두려웠다. 그러기에 더욱 꼭꼭 밀어넣고 가두었다. 손을 내미는 것보다 뒤로 감추는 것이 편했다. 감정은 숨기고 이성은 꺼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사랑이었지만, 성공은 내가 노력한만큼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최고가 되어야 한다. 그게 내 삶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 표현이고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들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다. 석사 과정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마쳤고, 근사한 전시를 했다. 든든한 후견인이 생겼고 남들이 입을 벌릴만한 가격에 작품이 팔려나갔다. 화려했다. 모든 것이 괜찮고, 괜찮을 줄 알았다.

한국에서 전시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알았다. 장학금, 학점, 전시, 매번 주어진 목표치를 향해 죽어라 달리던 내가 졸업 후 완벽하게 목적을 상실한 것을. 불면과 강박은 병적으로 심해졌고, 내가 앓고 있는 것이 우울증의 한 종류임을 얼마 후에 알았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가족들과 통화하는 일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항상 잘 하고 있으리라 믿는, 절대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당신들에게 내 약해진 모습을 털어놓는 것은 죽기보다 미안했고, 무서웠다.

12월의 어느 날 새벽, 집에서 홀로 술이 떡이 되었고, 한국에 전화를 했다.
“정수야. 나 힘들어.”
내일이 되면 후회할 말들을, 불알친구 목소리 안주삼아 술과 함께 한 시간을 개워냈다.

또 다른 명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것이 싫었다.

 

뉴욕의 새로운 가족

Kiko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 집을 사서 이사를 했는데, 우리 가족 크리스마스 파티에 와 주었으면 좋겠어. 네 방도 따로 준비해둘게.”

루사이트 토끼 친구들 덕분에 인연이 된 Kiko는 한국을 좋아하는, 나와는 나이차가 조금은 나는 좋은 친구. 이제는 나에게 곧잘 한국말로 메세지를 보낸다. 고마웠다. 그래, 어디선가 술에 취해 다음날 홀로 맞이하는 아침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

크리스마스 이브, 길이 막혀 한 시간을 운전해 도착한 Westchester. Kiko의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캐롤을 들으며 따뜻한 저녁을 먹고, 와인 한 잔씩을 따라 트리 밑에 앉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누며 환하게 웃는 그의 가족들 뒤로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 나에게 Kiko가 커다란 상자 하나를 건넨다.

“나 . . . ?”
“그럼. 네 선물이야. 열어봐.”

스웨터다. 어쩜 이렇게 예쁘고 따뜻해 보일까.

처음 발을 들인, 이불이 잘 정돈된 낯설어야 할 커다란 방은 이상하게도 아늑했고, 그 묘한 기분과 함께 잠을 청한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따뜻한 햇살과 함께 스미는 달달한 냄새에 눈을 떴고, 계단을 내려가 마주한, 분주히 아침을 준비하는 Kiko의 뒷모습에서 잊었던 그리운 것들이 스쳐가기 시작한다. 차 안에 넣어두었던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져와서 가족사진을 찍자 했다. 큰아들 Rael과 여동생 Irene, 어머니 Rosangela, 그리고 Kiko. Rosangela는 너무나 기뻐했다. 이렇게 다 함께 사진을 찍어보는게 얼마만인지 모른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우리는 크리스마스 저녁을 위해 함께 칠면조를 요리했고, Rael의 여자친구 가족이 합류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풍경을 보며 옆에 앉은 Rael에게 말했다.

“넌 정말 멋진 가족을 가진 것 같아.”
“다른 사람처럼 말하긴. 이미 우린 널 가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우리가 너의 뉴욕 엄마 아빠가 되어주면 안될까? Rael과 Irene은 네 새로운 동생들이고. 특히 Irene은 이제부터 꼭 June을 오빠라고 부르도록 해라.”

하룻밤을 더 지내고 가면 안되겠냐는 따뜻한 부탁에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았지만, 다음날 한국서 오는 동생들을 데리러 나가야 하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차에 올랐다. 오빠 가지 말아요. 장난스럽게 외치는 새로운 가족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이, 이상하게 변해버린 뉴욕의 날씨만큼이나 포근하다.

고마운 가족들에게

이기는 게임만 하려 죽어라 달려오며 중요한 많은 것들을 잊고 살았습니다. 내가 최고가 아니어도, 내가 가장 잘 하는 일로 내 사랑하는 이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집과 가족은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댈 수 있는 곳임을.

가족의 부재가 가장 아렸던 칠 년간의 타국생활, 혈육처럼 큰 힘이 되어준 또 다른 엄마 아빠들, Valtinho, Ophelia, Roderick, Linda, Geoff, Elaine, Barbara, Alice, Ararat, Heather, Don, Anne, Elinor, Kiko, Rosangela, 모두 고맙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는, 나를 이토록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예쁜 동생과 함께 초록나무 밑에서 따뜻한 저녁밥을 먹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