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Dernière Classe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약속이나 한 듯 뚱한 표정들이 일제히 나를 맞는다. 매번 야외에서 했던 수업을 실내에서 한다 하니 녀석들 원망이 가득했으리라.

“오늘 수업, 공원이 아닌 교실에서 모이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 수업을 굳이 교실에서 진행하게 된 이유는 말이다. 오늘이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너희들을 가르쳐 왔지만, 사실 난 선생님 자격증을 딴 사람도 아니고 사진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나는 스물 세 살이다. 너희에게는 어른이지만 사회에서는 아직 아이인 그런 나이야. 이런 내가 어떻게 전공도 하지 않고 포토그래퍼라는 타이틀로 활동을 하고 있고, 지금 너희들 앞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제부터 잠깐의 옛날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지루할 수도 있고 제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단 일 초 간이라도 너희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난 그것으로 이 수업을 만족하며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난 학창 시절 지금 너희들이 양아치, 혹은 날라리라고 부르는 패거리 중의 하나였다. 어린 나이에 배운 술과 담배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비슷한 녀석들과 어울려 놀다보니 수업은 뒷전에 항상 땡땡이 치고 당구장에 붙어 있기가 일쑤였지. 성적은 자연스럽게 바닥을 쳤고 학교에서는 항상 문제아 취급을 당하고, 집에서는 공부 이렇게 해서 어떻게 대학 갈 거냐고 시달리고. 그렇게 항상 내 주위를 맴도는 억압을 견디다 못해 가출도 하고. 그 때는 모의고사 점수가 400점 만점이었는데 언젠가 200점이 나온 성적표를 보고 내가 생각해도 무슨 수로 대학을 갈지 까마득하더라. 결국 마지막에는 불안감에 잠깐 동안 책을 잡았고, 운이 좋았던지 수능 때는 어떻게 실력에 비해 과분한 점수를 받아 간신히 경기도 소재 공과대학에 합격을 했다.”

녀석들의 웅성거림은 의심으로, 그리고 이내 곧 호기심으로 바뀌는 듯 했다.

“그를 만난 건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학교에 적응을 하기 위한 각종 행사가 준비되어 있는 여행이었다. 숙소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했던 나는 근처에 있던 학생 자원 봉사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가 훗날 내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오리엔테이션 첫 날 저녁, 당일 일정을 마치고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기분 좋게 술에 취해 복도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밑에서 누군가 사발면 두 개를 들고 손짓을 한다.

“라면 먹을래요?”

아까 나를 도와줬던 자원 봉사자다. 난 흔쾌히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우리 둘은 라면을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같은 남자였지만 그의 인상은 참 호감이 갔기에, 나는 꽤나 빠른 속도로 그에게 말문을 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나보다 한 학년 선배이고 같은 학교 산업 디자인 학과에 재학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 후로 일 년 동안, 깊은 우정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만나면 종종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대학에 오면 난 모든 것이 달라질 줄 알았다. 사실 내 주변은 확실하게 변했다. 매일 꼬박꼬박 챙겨 입어야 했던 교복의 제재로부터도 벗어났고, 술 담배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험을 못 봤다고 때리는 사람도 없었다. 난 그것이 완벽한 자유인 줄 알았고, 그 그릇된 자유를 즐겼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생활의 연장—수업은 뒷전에 술과 유흥에 빠져 매일을 소비했고, 시험 때는 아는 게 없으니 그저 백지 한 장에 편지 한 줄 써서 내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1학년 기말고사 무렵 미술 교양 수업 그룹 과제가 있었다. 노는 것과 양심은 별개의 문제였던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면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인터넷으로 자료 조사를 했다. 링크를 타고타고 흘러가던 중 한 웹사이트에 접속을 했는데, 검은색 배경에 페이지 주인이 찍은 사진들이 수 없이 걸려있었다. 엿보는 마음으로 들춰본 일기장에는 그가 살아온 하루하루에 대한 인생철학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고. 참 멋진 사람이구나 . . . 나와는 다르게 말이지. 이런 사람은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일까. 프로필을 눌렀다.

딸깍.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다. 일 년 전 오리엔테이션 자원 봉사자. 어떻게 이 사람이 여기에 있지? 웹은 방대했고, 확률상으로 절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문제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시 후 나는 정적 속에서 깨어났고, 내뱉었다.

“죽고 싶다.”

이 사람, 나와 고작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 사람은 이렇게 인생을 멋있게 살고 있는데, 지금 난 무언가. 자유와 방종을 구분 못 하고 제 멋대로 삶을 굴려대고 있는 나는 정말 쓰레기인가. 한심했다. 죽고 싶었다.

다음 날 나는 장롱 안에 있던 자동 카메라를 꺼냈고, 주위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대로 찍어대기 시작했다. 그 사람처럼 사진을 찍는다고 내가 그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보았던 세상을 나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HTML을 공부하면서 웹사이트를 구상해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 정도 지나 해가 바뀐 1월 22일, 나는 처음으로 내 사진이 담긴 웹사이트를 오픈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진은 내 인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무심히 흘러가는 연속된 일상 속에서 시간을 정지시켜 기록하는 일은 정말 즐거운 작업이었다. 정원에 심어진 꽃들의 질서정연함 보다는 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나는 민들레 한 포기의 생명력이 보였고, 네온이 번쩍이는 도시의 화려함 보다는 철거되기 직전 황폐해진 골목의 슬픔이 보였다. 주위 하나하나 어느 아주 작고 작은 것까지 아름답고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때는 지금처럼 디지털 사진이 보편화 되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 어쭙잖은 일상의 스케치는 인터넷을 통해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하나에 열정을 쏟아 그것을 인정받으니 자신감이 생겼고, 그 어떤 일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대학 2학년, 그래서 난 학과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못할 수 있었던 그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기초가 부실하다 못해 없었기 때문에 낙서 가득한 고교 시절 책들을 다시 찾아 읽기 시작했고, 수업 때 조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강의 시작 이 삼십 분 전에 들어가서 항상 교수님 바로 앞 자리에 앉아 수업에 열중했다.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모두들 얼마 못 가 그만둘 거라고 말했지만 난 그럴수록 더 열심히 했다. 사실 그만두면 너무 쪽팔릴 것 같아서.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 상주하는 친구들과 친해졌고, 그들과 쉬는 시간 함께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배가 고프면 야참을 시켜 잔디밭에 도란도란 앉아 밥을 먹었다. 어느 날 저녁, 막차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두꺼운 전공 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정류장으로 달려가는데, 이야 . . . 이런 게 진짜 대학 생활의 낭만이구나 싶었다. 당연히 술 마시는 횟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간간히 한 번 있는 자리에서 마시는 술은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공부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풀기 위해서였는지, 난 술자리에서 더더욱 미친 듯이 놀았다. 참 신기하게도 그 한 번의 술이, 한 번의 자리가, 매일 마시고 놀던 예전보다 몇 배는 더 달았고, 몇 배는 더 신났다.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성적표를 받았다.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성적표에는 학비 감면액 일백육십만원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장학생이 된 것이다. 그 공부 더럽게 못하던 내가. 너무 기뻐서 학교 옥상에 올라가 고함이라도 질러대고 싶었다. 여기저기 자랑을 했다. 공부 잘하던 놈이 그렇게 자랑을 했으면 참 눈꼴시었을텐데 꼴통이 노력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고교 시절 친구들은 절대 믿지 않았다. 대학 가더니 뻥만 늘었다고 했다. 부모님도 믿지 못 하시면서 또 기뻐하셨다. 한 번 맛을 보니 이건 다시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 년 동안 공부하며 들여놓은 생활 습관을 다음 학기, 또 다음 학기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매 학기 장학금을 따냈고,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좋더라. 공부하라고 돈 주는 것도 좋고 여기저기서 인정받는 것도 좋더라. 하지만 더 좋은 건,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이긴 게 너무 좋더라. 하면 된다. 정말 하면 되더라. 그 때 얻은 또 다른 자신감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든든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스물 두 살, 3학년 1학기를 마쳤고 난 여전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틈틈이 이론도 겸하고 있었는데 영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 때 마침 2학기 커리큘럼에 사진 디자인이라는 강좌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게 교양 강좌가 아니고 예대 전공 수업이다. 학점은 자유 학점으로 처리되어 이수에는 문제가 없지만 예대생이 우글거리는 그 곳에서 공대생이 홀로 버텨낼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종종 모델을 부탁하던 여자 동기 한 명을 꼬셨다. 내가 네 성적은 책임지겠노라고 근거도 없는 호언장담을 했다. 며칠 간 녀석을 설득한 끝에 수강 신청을 했고, 첫 수업에 들어가 당당히 맨 앞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출석을 부르는데 전부 예대생이다. 다들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같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건가 슬그머니 후회가 된다. 교수님이 학생들 카메라를 이리저리 둘러보시다가 내 카메라를 집어 드셨다. 당시 S2 Pro라는 기종을 쓰고 있었는데 아는 형님에게 물려받은 악세사리들이 본의 아니게 고급이었다. 교수님이 대뜸 한 마디 던지셨다.

“폼 나는 건 다 달았네.”

학생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애써 웃었지만 철저하게 짓이겨진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 교수님은 학생들과 담배를 태우러 나가셨고, 내가 뒤에 있던 걸 모르셨나 보다.

“그 공대생 좀 사나 보든데.”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내뱉고 말았다.

“저희집 못살아요.”

당황한 교수님은 얼굴을 붉히셨고 난 강의실로 돌아왔다. 오기가 생겼다. 나는 카메라로 폼 재고 다니는 양아치가 아니다. 조사 과제가 나오면 수십 권의 책을 읽고 며칠에 걸쳐 페이퍼를 완성했고, 사진 한 장 찍어 오라는 과제가 나오면 며칠 날을 잡아 수백 장면을 만들어 그 중 딱 한 장을 골라 제출했다. 교수님이 나를 대하는 시선은 매 수업마다 달라졌고, 매번 내가 해 온 과제물을 예제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갈 무렵, 과제로 촬영했던 사진 한 장이 동아일보 사진 공모전에서 1등을 수상했다. 사진은 내가 찍었지만 그 사진을 찍게 된 동기는 교수님 덕분이니,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남아 교수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다.

“비록 너의 전공이 아니더라도, 지금처럼만 한다면 앞으로 좋은 스승을 만나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지금까지 자네 과제와 도록을 돌려주지 않았는데, 나에게 맡겨두면 어떨까. 앞으로 배울 네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우여곡절이 참 많았던 사진 수업. 강의실을 나오며 첫 수업날 내 독한 마음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래, 하면 되는구나.

3학년 2학기를 마칠 즈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나에게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때 당시 Paper라는 잡지에 내 사진 몇 점이 실리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 . . (중략)

 

해가 지나고 1월, 웹사이트를 통해 쇼호스트를 교육하는 장 선생님이라는 분께서 연락을 주셨다. 본인의 웹사이트 제작에 필요한 홍보용 사진을 촬영하고 싶은데 내가 담당을 해 주었으면 좋겠노라고. 장 선생님을 만나 촬영 콘티를 짜고 장소 섭외를 하고 몇 회에 걸쳐 촬영을 진행했다. 그 때 장 선생님 페이지를 디자인하는 분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장 선생님 눈이 워낙 높은 게 아닌데 사진에 너무 만족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감이 생겼고, 당시 내가 가진 모든 기술과 장비를 동원해서 촬영을 마쳤다. 내가 보수를 받고 찍게 된 첫 촬영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전공자도 아닌 내가 사진을 찍고 돈을 받았다. 인정도 받았다. 난 그 날 잠을 이루지 못 했다.

그 촬영을 계기로 장 선생님은 몇 명의 수강생들을 나에게 소개시켜 주셨다. 면접 때 제출할 사진이 필요한데 이전에 촬영한 사진이 엉망이라는 것이다. 압구정의 모 스튜디오에서 15만원에 촬영한 사진을 들고 수강생들이 찾아왔다. 사진을 보니 내가 더 잘 찍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무슨 근거 없는 용기였을까. 난 같은 금액을 지불하면 훨씬 좋은 사진을 만들어 주겠노라 말했고, 내 두 번째 손님들을 촬영했다. 손님들은 결과물에 매우 기뻐했고, 또 다른 수강생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나는 그 때부터 프리랜서 포토그래퍼가 되었다. 카메라 한 대로 사람을 만나고 촬영을 하고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았다. 그것은 학교에서 하는 공부와는 또 다른 도전이었고, 삶의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당시 나는 2학년 때부터 관리해 온 학점 덕분에 주변에서 대학원 진학을 권유 받고 있었다. 선배들과 교수님들이 그려 준 이상적인 내 미래는 정말 멋있었다. 학사 과정을 마치고 공백 없이 석사, 연구원, 그리고 서른에 박사까지. 안정적인 생활과 연봉도 좋았고 젊은 나이에 박사가 되는 것도 무척이나 동경할 만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군대도 미루고 학점 관리에 열을 올렸다. 이대로만 가면 돈과 명예가 함께 하는 밝은 미래가 성큼 다가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난 4학년 1학기가 시작될 무렵 망설임 없이 휴학계를 냈다. 나를 이끌어 주던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했다. 난 사진에 미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정적인 생활도 좋다. 하지만 뜨겁게 살고 싶었다. 돈을 조금 못벌어도 하루하루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들을 만났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는 것, 처음에는 정말 어색하고 많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 좋은데 어떻게 하지. 오늘 수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너희들을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 기분이 묘하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더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공원에 모여 사진 찍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안녕을 인사했으면 편했겠지만, 또 다른 후회를 남기기 싫어 굳이 너희들을 이 교실로 모이게 했다. 하루 사진을 찍지 못 한다 하더라도 앞으로 너희들 살아가는데 좀 더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다시 한 번 너희들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내 작은 이기심을 용서해라.

뜨겁게 살아라.
돈 많이 버는 일 보다는 정말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지금도 앞으로도, 꿈을 꾸는 너희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예쁠 것이다.

이것으로 너희들과 나와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도록 하겠다. 그동안 고마웠다. 이상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짧은 시간 나도 모르게 많은 정을 주었던 친구들과의 작별을 고했다. 잠깐의 침묵 후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이내 그 작은 교실안에 채워진 고사리 손들의 박수 소리는 끝내 내 눈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반장 윤찬이 녀석은 수업 후 내내 곁을 맴돌더니 버스 타는 길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 영원한 이별은 아닐거야. 세상은 참 좁다는 것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니. 또 보자. 내 생에 첫 번째 제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