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tinho Anastacio

 

“그런데 누구예요?”
“아빠요.”
“아빠가 브라질 사람이에요? 준태씨 혼혈이었어요?”
“하하 . . . 좀 브라질 사람 같아 보여요?”


아마도 2004년 9월 정도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가게에서 서빙을 보던 중, 어떤 중년의 한국인과 외국인 한 명이 앉은 테이블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당시 일기를 뒤적거려보면, “우피 골드버그를 닮은 외국인 남자”라고 쓰여 있다.) 이유인 즉슨, 카레 맛이 이상하다는 것인데 내가 먹어본 결과 별 탈이 없으니 그저 죄송하다고, 다음에는 더 맛있게 해 드린다는 말만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었다. 주방으로 돌아와서, 가게 분위기도 어수선해지고 내 기분도 울적해진 탓에 음반창고를 뒤적거려 Pat Metheny의 Travels를 틀었다. 나의 스무 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그 남자의 홈페이지에서 항상 흘러나오던 음악—이 음악을 들으면 항상 마음이 참 편안해진다.

“어 . . . ? 이 음악 누가 틀었어요?”

갑자기 홀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 그 한국인과 외국인이 앉은 테이블이다.

“아 . . . 제가. . . .”
“당신은 누군데 이 음악을. . . .”
“전 이 집 아들인. . . .”
“뭐라구요? 당신이 이 집 아들이라구요? 그럼 이 사진들을 찍은 사람?”

두 사람의 태도가 갑자기 호의적으로 변했다. 뭘까. 한국인 남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내가 사진을 하는 당위성을 엄마에게 증명하기 위해 가게 벽을 내 사진으로 도배를 해 놓았었는데) 이틀 전 밥을 먹으러 가게에 들러 사진을 본 두 사람이 엄마에게 사진의 출처를 물었고, 나를 한 번 만나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이곳을 찾은 것이라 했다.

“우리 얼마 전에 Pat이랑 같이 공연했었어요!”
“아 . . . 음악하는 분들이신가 봐요 . . . ?”
“그렇죠. 난 프로듀서, 이 친구는 퍼커션.”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 . . 하는 생각을 했다. Pat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거장과 함께 음악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 . . 한국인 남자의 손짓에 브라질 남자가 웃으며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넸고 곧 공연이 있으니 와서 촬영을 담당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둘은 가게를 떠났다. 뭔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명함을 꺼냈다. Valtinho, Percussionist. 선명한 붉은색 배경에 진한 검은색으로 쓰여진 글씨.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은 기회였다.

‘이 사람과 친해진다면 . . . 외국에 나가지 않고서도 영어를 배울 수 있다.’ (사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즉시 인터넷 창을 열고, 명함에 있는 주소로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고, 또 영어도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곧 군대를 갑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한 달뿐입니다. 당신과 가까운 시일 내에 술 한잔을 하고 싶습니다.”

잔뜩 흥분해서 보낸 메일이지만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유명한 사람 같았고, 또 바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 같은 한국인 꼬마를 신경쓸리 없겠지. 하지만 웬걸,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만납시다.”

느지막한 오후, 우리는 서현역의 한 선술집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꿈과 가치관, 그리고 세상의 사랑에 대해서. 술의 힘을 빌려 되도 안 되는 영어를 억지로 짜내는 나에게 그는 단 한 차례도 성가셔 하는 표정을 내비치지 않았고, 우리는 술과 함께 그 날 밤을 지새우며 긴 시간을 함께 했다.

“또 볼 수 있겠죠?”
“물론이지.”

그 후로 우리는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꼴로 만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한 한 달 남짓했던 시간은 정말 내 인생에 있어 마법과도 같던 시간이었다. 그는 나를 그의 공연에 초대했고 나는 그의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의 셔터가 내려가고, 그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씨익 웃음을 보일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그는 내 사진을 정말 좋아해 주었다. 매번 공연과 뒤풀이 때마다 나를 초대했고, 내 생에 정말 존경해 마지않는 훌륭한 뮤지션들 앞에서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내가 아는 세계 최고의 사진작가 친구.”

아마 두 번째 공연이었던가. 산에 형(몇 번의 만남 후 우린 나이차가 조금은 나는 형 동생 사이가 되었다.) 차를 타고 함께 뒤풀이 장소로 향하면서 나는 사람들 몰래 고개를 숙여 볼을 꼬집었더랬다. 이거 정말 꿈은 아닌가.

마법과도 같던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한 달은 성큼성큼 지나갔고, 입영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빡빡머리를 멋쩍게 긁적이며 나타난 내 모습은 아마 꽤나 우스웠겠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짧은 포옹, 그렇게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나는 훈련소에 입소했다. 그리고 한 달간의 군사 훈련 후, 우리가 헤어졌던 그 장소에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잘 돌아왔다.”

그는 웃었다.

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직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던 탓에 근무가 없는 날이면 그를 찾아 예전처럼 함께 술 한잔을 기울이곤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 속 깊은 곳 이야기들을 꺼내어 주었고, 그러한 날들이 하루, 또 하루 계속되며 우리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끈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리 솔직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당시 나는 남들처럼 어학연수 갈 형편이 안 되니 한국에서 어떻게 영어를 배워야 할까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그를 만난 것이다. 사실 나에게는 굳이 그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본 목적을 잊고 있었다. 무언가 아주 기분 좋은 술에 취한 듯 시간은 흥겹게도 흘러갔고,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나를 아들이라 부르고 있었고, 나 역시 그를 자연스레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는 내 소중한 벗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이야기를 했고, 그를 나의 아빠라고 소개했다. 그 역시 내 평생에 걸쳐 단 한 번의 만남도 가지기 힘들 것 같았던 소중한 인연들을 나에게 선물해 주었고, 그들은 단지 내가 그의 한국인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고,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에게는 전부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도, 말 못할 고민과 비밀이 생겼을 때도—내가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꺼내어 놓을 때면, 그는 얼굴 한 가득 예의 그 푸근한 웃음을 머금고 함지박만한 손으로 내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내 아들이니까.”

그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학교에서 일등 했다고 자랑스럽게 그의 앞에 성적표를 내밀었을 때도, 사랑을 떠나 보낸 것이 너무 아파서 그의 품에 안겨 서럽게 눈물을 쏟아놓을 때도—때로는 양 볼을 살갑게 간지럽히는 즐거운 바람처럼, 때로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커다란 나무처럼, 언제나 그는 내 곁에 있어주었다. 사실 다투기도 정말 많이 다투었고 해결하기 곤란한 상황도 많이 겪었다. 처음 싸운 게 아마 홍대에서 소주 한잔 하고 아는 형님네 집에 함께 묵을 때였는데, 빨래 건조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언성을 높였던 기억이 난다. 어이 없었던 것은 싸우는데 웃음이 나더라. 내가 영어로 싸울 수 있다니. 그리고 그보다 더 어이 없었던 것은 다음 날 잠에서 깬 그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 것. 그 후로도 문화적 차이나 이해의 차이로, 그리고 대부분 술의 문제로, 우리는 꽤 잦은 다툼을 벌였고 나는 결국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인연 끊자고, 다시는 보기 싫다고. 그렇게 한 이 주 정도 연락을 끊고 지냈는데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더라. 짜증내는 거, 술 많이 마시는 거, 그저 타국에서 홀로 지내는 것이 힘들어 그러는 것이었을텐데. 심한 말 했던 것이 은근히 후회도 되고 걱정도 되더라. 그러던 와중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하지만 너만은 나를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술 한잔을 걸친 탓이었을까. 우리 엄마보다 두 살이 많은 그는 전화기 건너편에서 울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함께 즐겨가던 삼겹살집을 찾았다. 소주 한 병을 나누어 먹으며 배를 채웠고, 그는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듯 뜸을 들였다. 이상하게도 평소와는 다른 그의 진지한 모습—왜일까. 힘겹게 소주 한 잔을 넘기고, 그가 말했다.

“고맙다. 그 동안 나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 . . . 다 받아줘서 너무 고마웠다. 정말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함께 지내며 미안한 일이 참 많았지만 이것만은 꼭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 중에 최고로 내가 믿고 있는 사람이고, 또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은 내 아들이라는 것. . . . 한국이라는 땅에서 너를 만날 수 있어 정말 행복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그의 집 열쇠 꾸러미를 내 손에 쥐어 주었고, 그 넓은 가슴에 숨이 막히도록 나를 부둥켜 안았다. 그리고 그는 말레이시아로 긴 여행을 떠났다.

“I love you.” 그가 나에게 가르쳐준 말, 그리고 항상 들려주었던 말.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에게 그 말을 쓸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친구였고, 아빠였고, 선생님이었다. 나의 철없던 접근의 목적은 그에게서 영어를 배우는 것이었으나, 그는 나에게 문자가 아닌 마음의 언어로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꼭 몇 가지 단어의 조합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얼굴로, 표정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상대방에게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가르쳐 주었다.

그와 함께 하는 곳은 언제나 즐거운 음악과 사람이 부대끼는 장소로 변했다. 황학동에 옛날 물건들을 구경하러 간 날이면, 그는 좌판에 널린 주판 두어 개를 집어 즉석에서 흥겨운 리듬을 만들어내었고, 나와 시장 아저씨들은 어느샌가 주변에 널린 북이며 젓가락 등을 집어 그의 장단에 맞춰 쿵짝쿵짝 덩실덩실 흥을 돋우곤 했다. 어느 곳이나 그렇게 변했다. 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찾은 선술집에서도, 전시가 있던 인사동 거리 한복판에서도, 그는 그의 음악 속에서 처음 만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놀라온 경험을 선물했다.

그는 나에게 알려주었다. 서로 좋은 친구가 되는 데에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우리의 체온과 사랑, 그리고 음악—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인간과 인간의 언어. 그가 보여준 세상은 내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모두가 마음과 음악으로 이야기 하며 공존하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언제가 되었건, 나의 브라질 아빠 이야기는 꼭 한 번 글을 써서 남겨 놓고 싶었다. 스무 살에 꿈을 찾았지만 그 세상으로 뛰어들 용기가 없던 내게, Valtinho는 그 꿈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보여 준 스승이고, 내가 소중한 이들과 손 잡고 나아가야 할 이유를 선물해 준 내 청춘의 벗이며, 가족이기에. 이제 곧 그가 돌아올 날이 다가온다. 당신이 돌아오는 겨울, 나는 당신의 부재가 너무도 시렸던 이 마루를 따땃이 지피고, 아주 좋은 술 한 병과 함께 긴 여행을 마친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따뜻한 이야기와 음악 속에서 우리의 밤을, 우리의 인연을 데워나갈 것이다.